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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간략한 역사

에움길 발행일 : 2022-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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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간략한 역사

구석기시대부터 현재에 이르는 부산의 간략한 역사입니다. 간략하게 정리하였으며, 글은 비주기적으로 수정될 수 있습니다.

고대의 부산 역사

구석기시대

부산에 사람이 살았단 시대는 구석기시대이다.. 해운대 좌동 , 중동, 청사포 유적지 등에서 각종 석기가 발견되었는데 모두 구석기시대의 것이다. 또한 금정구 노포동에서도 구석기 유물이 발견되어 부산은 매우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거주한 곳으로 보인다.

 

선식기 시대

선석기 시대로 넘어오면서 부산은 바닷가 중심의 생활을 한 것으로 보다. 동삼동 조도 영선동 패총에서 신석기시대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빗살무늬토기와 작살 낚싯바늘 등을 발견했는데 이는 모두 신석기시대의 유물이다. 현재 이곳은 보존하지 않고 매립되었다.

 

청동기 시대

조도 패총에서는 청동기 시대의 유물도 발견되었다. 구연 토기와 삼각형 석축 등 후기 한국 동검과 함께 출토되었다. 이것은 영도가 신석기를 비롯 청동기 시절에서 사람들이 거주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족이 풍부한 탓에 고대로부터 영도는 좋은 거주지였다. 하지만 영도는 많은 사람들이 살기에는 식수가 부족하다.

 

출처 신석기 시대 토기의 변천

 

 철기시대

 

기원전 150년 전후 약 300년 간을 부산의 철기시대로 본다. 이때는 우리나라의 삼한 시대로 삼국시대 초기에 해당된다. 부산을 비롯한 한반도의 남동부 지역은 철기 문화의 유입이 늦었고, 청동기 시대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다 서서히 철기 문화가 유입되면서 현재의 동래를 중심으로 발달한 것으로 보인다. 부산이란 지명은 원래 현재의 초량과 부산진 지역을 말한다. 일제강정기 이전까지 부산은 시골촌락에 불과했다. 조선시대는 동래를 중심으로 큰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현재 남아 있는 부산의 조선시대 유적은 대부분 동래에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을 중심으로 현재의 부산역 주변을 중심으로 매축공사가 시행된다. 그렇게 생긴 곳이 부산의 여객터미널이 있는 부산항 제1부두이다. 부산항의 매축 역사는 후에 따로 다룰 것이다.

 

 

삼국시대

삼국 시대 부산은 김해를 중심으로한 금관가야에 속했습니다. 후에는 경주를 중심으로 한 신라에 통합된다. 고려시대까지의 부산에 대한 기록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다만 해운대의 해운이 통일신라 말기 석학인 최치원의 자 해운에서 가져온 것이다. 해운이란 글자는 아직도 해운대 동백섬 등대 바로 아래 보존되어 있다. 하지만 실제로 최치원이 쓴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고려 시대

 

조선 시대

 

일본에 개항

부산에는 개항이전도 왜관이라하여 일본인들이 거주하는 마을이 있었다. 용두산 공원 근처에 있었고, 동래에 왜란이라 하여 따로 일본인의 마을이 있었다. 1876년 부산항이 정식적으로 개항을 한다. 

 

고속도로가 만들어 지기 전까지 대부분의 물자는 배로 운송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일본이 들어와 철도를 놓았기 때문에 그전까지는 모두 항만 운송이었다. 일본은 이러한 특징을 잘 알았기 때문에 강제적으로 항구를 개항하도록 한 것이다. 인천에 이어 부산은 두 번째 개항장이 되었다.

 

부산이 부산다움을 갖게 된 것은 바로 일본의 강제적 개항 때문이다. 그로 인해 부산은 어쩔 수 없이 양가적 감정이 존재한다. 하나는 식민지 수탈의 공간으로서의 반항심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으로 인해 부산이 거대한 도시로서 성장하는 것에 대한 고마움이다. 실제로 부산은 1980년대 중반까지 서양문물이 들어오는 입구로서의 역할을 감당했다. 이 부분도 나중에 따로 다룰 것이다. 하지만 서서히 항공이 발달하고, 서울 중심으로 바뀌면서 부산은 제2의 도시로서의 역할만 감당하게 된다. 부산은 90년대 450만 정도의 거대한 도시였지만 2023년 3월 현재 3,315,516명이다. 2040년 부산의 인구는 382만 명까지 하락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항구로서 가장 먼저 개항한 부산은 서구식 근대건물과 기관들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영사관을 비롯하여 병원, 우편국, 은행, 상업회의소 등은 매우 상징적인 건물들이 된다. 이후로 부산은 전 조선에 신문물을 전파하는 첨병과 같은 항구가 된다.

 

개항장이 되면서 부산의 중심은 동래에서 초량으로 이전하게 된다. 1905년 초량에 경부철도 종착역이 만들어진다. 원래 초량은 조선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철도역이 생기면서 이곳은 일본인들의 차지가 된다. 모든 문량은 부산항에 모였다. 일본과 가장 가까웠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

 

부산항의 이동

 

한일강제합방 이후 부산은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일본은 전 조선에서 수탈한 쌀, 소금, 면화를 중심으로 한 물자들을 부산항으로 철도편으로 가져왔다. 수많은 물자로 인해 공간이 비좁아지자 일본은 드디어 현재의 중앙동을 매립하기 시작한다. 1910년 현재 세관 부지와 여객부두를 매립한다. 당시 항만은 현재의 중앙동에, 철도는 초량에 있어 서로 거리가 있어 물자를 다시 옮겨야 하는 불편함 있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영선과 영국 영사관산을 깎아 마다를 매립하기에 이른다.  부산역이 현재의 중앙동 세관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게 된다. 그곳은 제1부두가 된다. 그로 인해 항과 철도가 만나 원활하게 물자를 옮길 수 있게 된다.

 

일제 강점기 초기의 부산항. 오른쪽 잘려준 부분이 용두산이며, 왼쪽 나무가 자라는 곳이 현재 롯데백화점 자리다.

 

매립은 1-3차에 걸려 이루어짐으로 현재의 부산항의 틀이 만들어지게 된다. 영도를 잇는 연륙교가 건설 되면서 부산항은 자갈치를 중심으로 한 남항과 세관이 있는 북항으로 분립하기에 이른다. 북항은 일반적으로 북항을 일컫는다. 부산 사람도 이 사실을 모르는 이들이 많다.

 

 

해방 이후

 

해방후 중국과의 교역

 

해방 이후 일본이 남겨준 공장과 건물에 사람들이 들어가 살고, 사업을 이어갔다. 일본과의 무역은 단절되고 홍콩과 중국과의 무역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1946년 대중국 무역 비중은 81.4%나 되었다고 한다. 일본의 단절과 중국과의 교역의 활성화는 부산이 사그라지고, 대신 인천이 중요한 항구로 떠오르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일제강점기 시절 줄곧 제1관문의 역할을 하던 부산이 해방 후 인천에게 자리를 내어 주었다.

 

 

한국전쟁, 위기가 기회로

 

하지만 중국과의 교역은 오래가지 않았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중공군이 전쟁이 개입하며 1.4후회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 사건이 <굳세어라 금순아>의 배경이 된다. 압록강까지 올라갔지만 중공군이 개입하며 다시 후퇴를 하게 된 것이다. 그 과정 중에 흥남부두에서 미국이 자신들의 군용 물자를 싣으려 했다. 하지만 수만 명의 피난민이 몰리면서 물자를 버리고 피난민을 실은 일화는 아직도 유명하다.

 

<굳세어라 금순아>를 부른 현인을 기념하여 만든 현인노래비. 영도대교를 건너 영도 초입부에 자리한 영도경찰서 바로 앞에 자리하고 있다.

 

현인 노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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