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암동 소막마을 그리고 피난민들의 애달픈 삶
우암동은 부산광역시 남구에 속하는 법정동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한우를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해 소를 검역하던 소막이 있다 하여 '우암'이란 단어가 생겨났다. 암은 바위 암(岩) 마을 앞에 큰 바위가 있었다고 한다. 소와 바위가 합하여 '우암(牛岩)'이 된 것이다. 하지만 우암이란 지명이 1740년 동래부지에도 등장하는 것을 보면 '우'는 소우가 아닌 다다른 의미일 수 있다.
우암동의 유래와 역사
우암동이 조선시대부터 있었던 것을 확인해 본 바에 의하면 '우암'이란 지명이 언제 어디서 유래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을 정론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소막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지명을 결정하는 이유가 아닌 것이다. 우암이란 단어는 한참 전에도 이미 존재한 지명이었다.
부산시 남구 우암동 189번지. 주소는 영도구 청학3동 대림빌라 4동 1109호입니다.
참으로 상징적인 주소이다. 우암동과 청학동. 살인혐의로 법정에선 준석(유오성)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주소이다. 그만큼 우암동과 청학동은 아프고 애달픈 삶을 가진 이들이 기거하는 곳이었다. 오늘은 우암동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필자가 부산의 많은 마을들을 탐방하면서 느낀 점이 있다. 그것은 일단 자신들의 지역을 무척 사랑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억이 상당히 왜곡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러한 왜곡은 나쁜 왜곡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을 절대시 한 나머지 객관적으로 비교하며 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특이한 기억 착시 현상이다. 이 부분은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길~~게 언급할 것이다. 하여튼 오늘은 넘어가자.
일제강점기 시절의 소막사
우암동의 시작은 항상 일제강점기 소막사부터이다. 그럼 그 이전은 어땠을까? 안타깝게도 지명은 언급되나 더 이상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 일부 증언자?들에 의하면 일제강점기 이전에 이곳에는 사람들이 살지 않았다고 한다. 살았어도 서너 채 정도의 외진 곳이었을 것이다. 즉 마을이 형성되지 않고 밭으로만 활용될 정도의 공간이었다.(확인이 필요함, 일부 주민의 증언이지만 불확실함. 그들도 일제강점기 시절에 태어났기 때문에 그 이전은 알지 못함. 혹시 그들의 부모로부터 들었을지도) 부산남구 신문에는 구한말에 약 20채 정도의 집이 있었다고 한다.[[남구의 뿌리를 찾아서] <8> 우암동의 이야기길]
일본은 조선의 소들을 전장으로 보내고, 일본으로 빼가기 위해 부산의 우암동과 함경북도 청진에 우역검역소와 소막사를 짓는다. 그때가 1909년이었다. 강제합방도 일어나기 전에 일본은 모든 준비를 마친 것이다. 참으로 악날하다. 이렇게 우암동은 마을까지는 아니지만 사람이 사는 곳으로 변모하게 시작된다. 하지만 1945년 일본은 망하고 소막들을 그대로 두고 일본으로 들어간다. 우암동은 그야말로 버려진 공간이 된다.
해방 후 마을이 되다.
하지만 계속해서 텅빈 공간으로 남아 있지 않았다. 일본이나 타지로 강제징용을 떠났던 사람들이 부산(부산진 주변을 말함)과는 약간의 거리를 두지만 걸어서 갈 수는 있는 곳을 찾게 되고, 그곳이 우암동이었다. 우암동에서 부산진역까지는 고작 3.5km 정도이다. 이렇게 우암동에 적지 않은 사람이 정착하게 되고 마을을 형성하게 된다. 그 숫자가 얼마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 만 적어도 3000명 이상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순전히 추측일 뿐이다.)
6.25 전쟁 수많은 피난민이 우암동에 모이다.
우암동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건 6.25전쟁 때문이다. 수많은 피난민들이 부산으로 몰려왔다. 그렇게 해서 부산의 그 유명한 산복도로가 생기가 된다. 부산의 유명한 명승지?들은 대부분 전쟁으로 인해 생겨난 곳들이다. 우암동 역시 전쟁의 여파로 작은 마을에서 거대한 마을이 되었다. 우암동의 인구 절반 정도가 고향이 이북인 이유가 이 때문이다. 부산역사문화대전에 소개된 정남이 할머니 이야기도 고향이 이북이다. [출처 부산문화대전 "우암동의 월남 피난민 정남이 어르신의 이북 생활과 피난기"]
우암동에 가려면 동천삼거리를 지나 제7부두에서 내려면 된다. 물론 새마을굼고 앞에서 내리면 큰 길이 나온다. 제7부두는 일제강점기 시절 이곳을 매축하여 철길을 만들면서 형성된 곳이다.
우암동의 목재공장들
우암동은 정말 많은 사람들이 살았다. 가게 앞에 앉아서 연세가 지긋한 분들과 거의 한 시간 넘게 대화를 나눴다. 그런데 특이하게 모두들 '사람이 많았다' '목재공장들이 있었다' 등의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했다. 일반적으로 우암동 역사에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은 내용이다.
우암동 목재 공장이란 키워드로 검색하자 조금씩 정체가 드러났다. 우암동 앞에 7 부두가 생기기 전 그곳에는 수많은 공자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중의 유명한 곳들이 목재 공장이다. 성창목재, 광명목재, 철사 공장들이 늘어서 있었다. 거기에 부두에서 하역작업을 하는 사람들까지 우암동 사람들의 생계의 현장이었던 것이다. 지역N문화에서는 '우암동 피난민마을'로 부르고 있다. 이렇게 우암동은 본동네 사람, 피난민, 농촌에서 올라온 노동자들이란 세 부류의 사람들이 뒤섞여 마을을이루게 된다. 그들의 대부분은 목재공장과 부두에서 하역을 통해 생계를 이어갔다.
성창기업은 1916년 경북 영주에서 영창상점으로 지작해, 1948년 대구로 이전한다. 그곳에서 성창기업으로 바꾸고 합당사업으로 확장한다. 그러다 전쟁이 일어나 1955년 부산 남구의 우암동 앞으로 이전하게 된다. 위의 사진이 우암동 시절의 성창기업이다. 우암동의 수많은 사람들이 성창기업의 노동자로 살아갔다. [ 사진과 글의 출처는 부산시보 "목재산업 외길 - 부산 첫 100년 기업 우뚝'에서 가져옴]
목재공장들이 있었기에 우암동의 대부분의 주택들이 나무로 지어진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후에는 벽돌과 블럭 등으로 바꾸어 개축해 나갔지만 수많은 집들의 대부분(지금도) 내부적으로 판자와 흙으로 지어져 있다. 특히 구 우암골목시장의 집들이 그렇다.
모두 과거의 일이다. 이제는 우암동도 개발의 폭풍의 한 가운데 들어서 있다. 마을의 절반 정도가 싹둑 잘려 아파트 공사가 진행 중이다. 하지만 아랫마을은 언제 될지 가능성의 희미하다. 하지만 언젠가는 될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보아왔던 그 어떤 마을보다 가장 낙후된 곳이었다.
우암동 마을 풍경
제7부두와 우암선
우암동 옆과 앞으로 우암선 기차선로가 지나간다. 현재는 폐선되어 더 이상 지나기 않는다. 지상에 공개된 철로가 거의 유일무이하다. 대부분 지하로 들어가거나 차단되어 들어갈 수가 없게 되었다. 관광지로 활용하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복선이라 차선이 굉장히 넓은 편이다. 하지만 옆 도로는 대형 켄터이너선이 많이 불안하다.
우암동 앞으로 부산시내버스 23번 26번 68번 134번 168번 138-1번이 지나간다.
7 부두에서 내려 우암동으로 들어가는 입구다. 이곳을 지나면 (구) 우암2동으로 들어간다.
소라 미용실. 이제는 더 이상 운영되지 않은 미용실이다. 예전에는 '소라'라는 가계이름이 참 많았다. 소라다방, 소라점빵, 소라슈퍼, 소라문방구. 특히 '소라다방'은 아직도 많다. 왜 소라라는 이름이 그렇게 유행한 걸까? 참 궁금하다.
마을 아랫쪽에 큰 길이 뚫렸다. 필자야 이곳에 처음 들르니 그려러니 하지만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은 이러한 변화에 충격 아닌 충격을 받을 것이다. 지금은 이런 모습이지만 불과 십여년 전만해도 수많은 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곳이었다고 한다.
태백상회 앞. 할머니들과 30분이 넘도로 대화를 나누었다. 지난 과거의 이야기들을 털어놓으셨다. 삶아온 삶이 애잔하다. 사진을 찍겠다 부끄러워하면서 괜찮다고 한다.
슈퍼를 지나 마을로 들어갔다. 길은 그리 좁지 않으나 옛길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집들은 개선의 여지없이 상당히 낙후되어 보인다.
지금은 이렇게 좁은 길도 휑해 보이지만 4-50년 전에는 사람이 발 디딜 틈이 없었다고 한다. 출퇴근 시간이 되면 집들에서 나와 목재소로 진시장 근처에 있는 조선방직 등으로 일하러 나갔으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비좁을 골목을 다녔을까?
마을 구경을 하는데 갑자기 고양이 한 마리가 저기서 걸어온다. 어? 품종묘? 뭐지? 그런데 많이 아파 보인다.
우암동에는 공동 화장실이 은근히 많다. 판자촌이었던 탓에 집 안에 화장실 없는 곳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대부분 다 화장실이 집 안에 있다.
헉.. 또 고양이가 문 안쪽 나무 위에 올라가 졸고 있다.
평양에서 오신 할머니. 아마도 이분이 부산역사문화대전에 인터뷰 하신 분이 아닌가 싶다. 평양에서 오셨다고 한다. 자식들은 다 커서 나가 있다. 그냥 이곳이 좋단다. 살아서 평양에 한 번 가보고 싶었는데... 말 꼬리가 흘려진다. 고향이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평양에 대해 이것저것 말씀하신다. 돌아가지 못한 피난민들의 한이 우암동에 서려 있다. 30분 넘게 대화를 했다. 우암동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다. 재개발을 안 했으면 좋겠단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누가 죽고 싶을까. 건강하게 오래 사셨으면 좋겠다. 사진을 찍고 싶다니 하니 "뭐 하려고?" 하시면서 찍으란다. 나중에 다시 가면 뭐 좀 사가서 드리고 싶다.
절반이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주택의 일부다. 우담동의 대부분의 집들은 이렇게 합판을 잇대어 만들어 졌다.
소우막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마을 중앙 길로 갔다. 소막을 그대로 두고, 안에 집을 꾸몄다. 하... 이런 세월을 살았구나. 참 애달픈 세월이다.
중앙 큰길을 너머 동향성당 아랫마을로 갔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곳이 우암동 새 시장 골목이라고 한다. 현재 우암동 골목시장으로 알려진 곳은 옛시장골목이다. 이 길은 마을 중앙을 가르지만 현재 아파트 공사로 중간이 막혀있다. 아마 성당 앞으로 큰 길이 새로 뚫려 있던데 그곳으로 연결될 것 같다. 현재도 연결되어 있다.
현주소로 우암로 200번 길 마을이다. 아무 생각 없이 이곳에 들렀다 너무 놀랬다. 지금까지 보았던 그 어떤 산복도로 집이나 피난민촌보다 열악하고 좁았다. 한 사람이 겨우 다닐 골목들 안에 수많은 집들이 2층 3층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그냥 할 말을 잃었다. 후에 마을 주민을 만나 이곳의 이야기를 한 참을 들었다.
이곳에는 특이하게 건물 중간이 뚫려 터널처럼 지나는 곳이 의외로 많다. 그 위로 작은 집들이 끊임없이 이어져 있다.
기반도 흙 위에 돌을 쌓고 그대로 올렸다. 무너지지 않도록 시멘트로 밖을 도포했다. 아마 시멘트로 덧 씌운 것도 70년대 이후였을 것이다. 그전에는 흙 그대로 있지 않았을까?
이렇게 좋은 골목 위에 집들이 2층 3층까지 올라가 있다. 보기만 해도 아찔하다. 이러한 집들은 일제강점기 시절이나 6.25 피난민들의 집이 아니라고 한다. 대부분 시골에서 돈을 벌기 위해 올라온 이들에게 세를 주기 위해 집을 개조하고 자르고 올려 만든 집들이라고 한다. 본주민과 피난민들은 이렇게 하여 월세를 놓아 돈을 벌었다. 공간이 너무 좁아 발을 뻗으면 어떤 공간도 남아 있지 않는 방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이런 곳에 화장실이 있을 턱이 없으니 공동화장실이 많았던 것이다.
공간이 있기만 하며 이렇게 칸을 치고 방을 만들었다.
계단을 올라가 봤다. 정말 작은 방이 하나 있었다. 올라가는 계단도 너무 좁아 몸을 움츠려야 했다. 그때 그 시절, 그렇게 그들은 돈을 벌어 시골의 부모님께 보내 드렸던 것이다. 참으로 위대한 분들이다.
여기도 판잣집이 있다. 이렇게 판자가 그대로 드러난 집도 몇 있지만 대부분은 밖에 색도 칠하고, 엷은 시멘트로 칠해 놓은 곳들이 있다.
엷은 시멘트가 벗겨지면 여지없이 흙으로 된 속살이 드러난다. 이곳의 상당수의 집들이 이런 형태이다. 이런 형태의 집들은 대부분 피난 와서 이곳에 땅을 받고 스스로 집을 지어 올린 사람들의 집이다.
마을의 공동 우물이다. 아마 당시에는 이런 우물이 여럿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폐쇄하며 자물쇠까지 잠가 놓아 열지 못한다.
이곳이 본격적인 우암동 새 시장 골목이다. 연회석 완비. 참 예스럽다.
딱 봐도 당시 젊은 사람들이 좋아할 메뉴들이다. 이젠 모두 떠나고 건물만 외로이 남아 있다. 돈까스와 냉면 분식집이다.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갈 때면 옹기종기 모여서 식사를 했을 것이다. 학교를 마친 학생들도 이곳에 모여 잡담을 나누며 즐거워하지 않았을까?
사진을 찍고 있으니 물어본다. 어디서 왔냐고. 부산에 산다고 이야기하고 앞에 앉았다. 여기서도 거의 30분 이상을 이야기했다. 아들은 해운대 살고, 또 공무원 하고 자식들 자랑이다. 나이 들면 그것 말고 또 있을까? 그대로 고생하며 살았으니 복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왜 이곳에 사느냐고 물으니 편하단다. 그냥 이곳이 좋다고 한다. 예전에 이곳이 참 좋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 재개발하면서 사람들이 보상받고 다 떠났다고 한다. 아랫마을은 재개발을 안 했으면 좋겠단다. 보상받아도 그 돈으로 갈 데도 없는 사람들이 많단다.
얼마 전에는 혼자 사는 노인이 먼저 갔다는 이야기도 한다. 나도 언제 갈지 모른다며.
"그래도 건강하게 사셔야죠. 자식들이 부모를 그리워하는데."
"머할라꼬?"
앞에 가게를 하시는 분은 남편분과 두 분이서 사신다. 옛날에는 남편이 장사를 다녔다고 한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 그냥 이곳에 있는 물건만 팔고 있다고 한다. 화분 몇 개와 과일과 반찬 몇 가지가 전부다.
옛날 목재 공장 있을 때 겪었던 재미난 이야기도 들려준다. 큰길로 나가면 술집이 많은데, 어떤 총각이 월급 받은 날 아가씨집에 들어가 다털려서 맨 몸뚱아리고 쫓겼나다고 한다. 길을 가다 발견하고 1000원을 줘서 택시태워 보낸다고 한다. 그러면서 한참을 웃으신다. 전혀 몰랐는데 아래의 사진을 보면 큰 길로 나오면 작은 주점들이 많다. 물론 지금은 다 빈집이다. 그때를 생각하니 참 우습다. 그 할머니의 말의 어디까지가 뻥이고 사실인지 알 수 없으나 실제 그런 일은 비일비재했을 것이다.
큰 길 가에 즐비한 주막?들.
우암동에 고양이가 정말 많다. 특이하게. 요 녀석은 내가 가도 겁도 없이 계속 누워 잔다. 그러다 일어나 째려본다. 가져간 사료를 던져주니 잘 먹는다.
정말 인상적이었던 집.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50cm도 되지 않을 것 같다. 캬.... 정말..
만보기는 벌써 15000보가 넘어갔다. 다리가 후들거린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참 먼 여행을 하고 돌아가는 것같다.
내호냉면 이야기는 다음 이야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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