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전동 포푸라마치 마을
포푸라마치 마을은 사상구 감전동에 있었던 매매춘 지대를 말한다. 중심가는 현재 포플러다방이 있는 골목이지만 그 주변까지 넓게 퍼져 있었다. 이곳은 저녁이 되면 청소년 통행금지 구역이었다. 다른 이름으로 뽀뿌라마치, 포플러마을 등이 있다. 뽀뿌라 또는 포푸라는 '포플러나무'를 말한다. '마치'는 일본어로 마을이다. 포플러 나무가 많은 마을이란 뜻이다.
[출처 카카오지도 https://map.kakao.com/]
포푸라마치의 유래
포푸라마치는 감전동의 유래와 역사와 맥을 같이 하지만 여기서는 곧장 포푸라마치로 넘어가보자.
[감전동에 대한 이야기를 아래의 글을 참조바람]
감전동은 모래와 펄이 뒤석인 낙동강 하루 지역이다. 이러다 보니 사람들이 살 수 없어 조선시대부터 제방 작업을 하게 된다. 일제강점기 시절은 어느 정도 시골 형태의 마을이 띄엄띄엄 들어선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현재의 포풀러마치 주변에는 수많은 포플러 나무가 자랐다고 한다. 포플러 나무가 커지는 것은 불과 몇 년만 있으면 된다. 아마도 조선시대에는 없었을 수도 있다. 포플러 나무의 수명은 50년 정도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여튼 일제강점기 시절 이곳에는 수많은 포플러나무가 있었다.
- 포플러나무는 습기가 많은 곳에서 잘 자라란다. 수명은 50년 정도이고, 그 이후는 쉽게 나무가 죽는다. 뿌리가 깊이 들어가기 때문에 건축물 가까이에 심으면 건물이 파괴되고, 도로 등이 금이 가기 때문에 멀리 심어야 한다.
고종 39년인 1902년 초량에서 구포까지 경부선 철로 1차 공사가 시작된다. 철로 공사장에서 얼마 멀지 않았던 감전동에 노동자들을 상대로 주막이 생기기 시작한다. 일본 노동자들이 주막을 찾게 되는 데 이곳에 포플러 나무가 많아 감전동을 '뽀뿌라마치'로 부르게 된다. 이후 이곳은 뽀뿌라마치가 된다. 공사가 마친 후에도 이곳은 많은 사람들이 찾았다. 사상역이 개통을 하면서 기차를 타려는 이들과 서전(현재 감전동 행복센터 주변) 마을로 도로가 생기면서 주막을 찾는 이들이 생겨났다.
포푸라마치가 주점과 윤락가의 형태로 발전하게 된 계기는 6.25 전쟁 당시 사상 팔경대(현 파라곤 주변)에 고사포 부대가 주둔학 되면서 주점들이 많았던 포푸라마치는 술을 팔고 자신의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던 여성들이 급속하게 늘어나게 된다. 이후 70-80년대 산업화와 맞물리면서 감전동의 뽀뿌라마치는 부산의 4대 집장촌으로 성장하게 된다. 부산의 3대 집창촌은 충무동의 안월동, 감전동의 뽀뿌라마치, 해운대의 609다. 마지막 한 곳은 현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부전도 250번지로 부전역 바로 앞에 있었다. 현재는 삼한골든뷰센트럴파트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감전동은 규모면에서 세 번째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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