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대첨사 윤흥신 장군상
다대첨사 윤흥신 장군상
윤흥식 장군의 간략한 생애
다대첨사 윤흥신(尹興信)은 조선중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파평이다. 임진왜란 초기인 선조 25년 1592년 부산 다대포 전투에서 왜구를 막아 장열 하게 싸우다 전사하였다. 전쟁이 일어날 것을 미리 대비하지 못한 조선은 왜국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다. 다대포성에서 끝까지 싸웠지만 결국 다대포성은 함락되고 조선군은 완패하고 말았다. 그때 다대첨사 윤흥신도 전사하였다고 한다.
왜군은 명나라를 정발한다는 말로 조선에게 길을 내라고 말했지만 조선을 거절한다. 왜놈들이 조선을 정벌하려는 속임수였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이 왜군에게 땅을 내줄 이유도 없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왜군은 동래성과 다대포를 동시에 공격하게 된다. 동래성고 다대포성도 왜국에게 함락당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사하거나 죽임을 당하게 된다.
다대첨사 윤흥신은 중종의 제1계비 장경왕후의 조카이고, 대윤 윤임의 아들이다. 진천현감 등을 거쳐 다대포 첨사로 재직중이었다. 부산진을 점령하고 다대포를 향한 왜국에게 역부족으로 참패를 한다.
윤흥식의 아버지 윤임은 을사사화에서 화를 입고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한다. 이때 윤흥식의 나이는 고작 5살이었다. 모든 가족들이 죽임을 당해야 했으니 5살이란 어린 나이로 인해 가족이 함께 죽임을 당하는 것에서 면제된다. 하지만 역적의 아들이었기에 모든 신분을 잃고 노비로 전락한다.
선조가 집권을 한 후 을사사화의 모든 누명이 벗겨지고 윤흥신도 다시 신분을 회복한다. 1582년 진천현감이 되지만 어릴 때부터 노비로 살아 한자를 읽지 못해 파직 당한다. 1592년 수군에 등용되어 다대진을 수비하는 다대포 첨사가 된다. 하지만 얼마가지 않아 임진왜란이 일어나 순직을 당한 것이다.
부산시는 임진왜란에서 왜군과 장열하게 싸우다 숨진 윤흥신 장군을 기념하기 위해 1981년 초량3동 1143번지에 석상을 건립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대리석이 깨지고 곳곳에 녹이 슬면서 관리가 어려워졌다. 파평 윤 씨 종친회는 사하구 다대동에 있는 윤공단으로 석상을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게 된다. 하지만 옮기는 것도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오랜 논의 끝에 기존의 대리석상은 2020년에 철거되고, 그곳에 새로운 윤흥신 장군상을 건립하기로 한다. 기존에는 넓은 석판 위에 여러상을 함께 올렸지만 이번에는 갑옷을 입은 윤흥신 장군상만을 홀로 기둥 위에 올려 세웠다. 방향은 바다가 보이는 북향을 향하도록 하여, 임진왜란 당시 바다를 통해 들어온 왜적을 향하도록 했다.
새로운 동상에 입혀진 갑옷은 2000년 부산 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을 개발하면서 발견된 갑옷을 본떠 만든 것이다. 수안역에서 발겨한 것들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과 왜군의 시신들과 무기, 갑옷들이 발견되었다. 이곳에서 발견된 것들은 수안역 입구 지하에 [동래읍성 임진왜란 기념관]을 만들어 전시하고 있다.
윤흥신 장군 동상 제막식
- 일시 2024년 1월 26잃 금 14:00
- 장소 윤흥신 장군상 광장
제막식에 대한 내용은 직접 참석한 산책하는 박부장의 <임진왜란의 부산 영웅 윤흥신 장국 동상 제막식>을 참고해 주세요.
장군상 옆에는 건립문과 사적기가 만들어져 전시 되어 있다. 장군상 뒤로는 윤흥신 장군의 생애를 음각으로 만들어 전시 중이다.
다대포진 첨절제사 윤흥신 장군상 건립문
임진년(1952년) 그 해 4월 바다 건너에서 밀물같이 닥쳐온 왜적의 무리와 대치하여 다대진성을 지키다가 마침내 죽음으로써 호국의 별이 되었던 윤흥신 장군! 장군이 순사 하신 지 3백89년(389년)이 흐른 지금 나라 위에 의롭게 바치신 고귀한 넋을 기리려는 후손들이 여기 뜨거운 추념의 마음을 모아 장군의 모습을 돌에 옮겨 세긴다.
장군의 굳은 결의에 따라 더불어 싸우다가 순절한 군관과 백성들의 모습도 함께 모신다. 이는 나라를 지킴에 있어 한결같았던 애국정성을 드 높이 받들고자 함이다. 난을 전후 나라 안은 당쟁으로 어지러운 데다 국방 또한 소홀했던 시기여서 이때를 틈 탄 왜적들은 유구한 역사의 땅 그 남단 부산을 발판으로 산아 대군을 거느리고 기습 상륙을 감행했다. 왜적들은 불시에 다대포성에도 밀어닥쳐 성을 함락시키고자 갖은 살상과 파괴를 서슴지 않았다.
적의 침략 내습에 대비하여 응전의 태세마저 갖추기 전이어서 우세한 병기를 쓰는 적의 공격을 감내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노릇이었다. 다만 황급한 때를 당하여 죽음을 앞세운 처절한 접전이 요구될 뿐이었다. 우리 역사상 국력과 국방의 힘이 이다지도 절실하던 때가 또 있었을까!
한 무인으로서 윤흥신 첨사의 가슴에 교차된 만감의 회환을 우리는 익히 헤아리고도 남음이 있겠다. 군관은 흩어지고 쓰러져가는데 고립무원 홀로 버티던 장군은 마지막 피를 뿌리면서 성의 함락과 함께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장군의 비장한 전사는 7년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꺼지지 않는 횃불처럼 어두워가능 사직의 하늘을 불 밝혀 수많은 의병의 봉기와 항전의 말없는 길잡이가 되었으리라.
장군이여 오늘 그대 단성의 넋을 석상으로 다듬어 모든 후대인에게 나라 사랑하는 크나큰 거울로 삼고자 한다.
다대포진 첨절제사 윤흥신 장군 사적기
공은 장경왕후(章敬王后)의 오빠 되시는 좌찬성(左贊成) 윤임(尹任)의 아들로 을사사화(乙巳士禍, 1545) 때 아버지와 두 형이 죽음을 당하고 가족과 자산도 몰수되었다가 1570년(선조 3년)과 1577년(선조 10년) 두 차례에 걸쳐 관작을 복구하고 재산을 찾고 남은 아들을 등용하도록 하니 공은 그 형제 중에 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공이 다대첨사가 되기까지 어떻게 지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을사사화만 없었드라면 공은 왕실의 외척으로 권세를 누릴 사람이었다. 윤공의 전망사적은 <충렬사지(忠烈祠志)>에 대강 나타나 있다. 즉 임진(1952년) 4월 14일에 적의 일부 병력이 침투해 와서 성을 포위하였으나 역전하여 이를 물리쳤다. 이튿날 적은 대부대를 거느리고 바다를 덮어 공격해 왔다. 부하들은 피신하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공은 이를 물리치고 성과 운명을 같이하기로 결심하였다. 성문을 굳게 닫고 남은 부하들과 같이 물밀듯 닥치는 적 앞에서 지주(砥柱)처럼 우뚝하게 성을 지키다가 시진도절(矢盡刀折)하여 장렬한 전사를 하였다. 가문의 불행을 딛고 풍운이 급한 때를 당해 죽음의 땅으로 부임하여 충척(充斥)한 적 앞에서 외로운 성을 끝까지 지키다가 의연히 죽음을 택하니 그 슬픔 비록 크다 하여도 그 절의 어둠 속에 한 가닥 빛을 남기니 거룩한 일이다. 비록 선무원종공신일등(宣武原從功臣一等)이 되었으나 변방의 일이라 그 사적이 오래 드러나지 않았다. 영조 때에 와서 원임부제학(原任副提學, (구)부제학) 조엄(趙曮, 1719~1777)이 <전망사적서(戰亡事蹟叙)>를 써서 충렬사에 합사 할 것을 건의하고 동래부사 강필리(姜必履, 1713~1767)는 <사절기(死節記)>를 적어 또한 합사를 강조하니 1772년(영조 48년) 예조의 품의를 거쳐 합사하였다. 그 뒤로는 충렬사와 윤공단에서 해마다 제사를 모셨는데 근자에 부산시는 다시 관내의 선열유적을 정화하고 송공 정공 윤공의 동상과 석상을 세우게 되니 이에 공의 사적을 석상에 부쳐 추모의 뜻을 표하는 바이다.
[윤흥신 장군상 공원 가는 길]
윤흥신 장군상은 고관입구 교차로, 메리츠 빌당 옆에 자리하고 있다.
- 부산 도시철도 1호선 부산진역 1번출구로 나와 횡단보도를 건너면 바로 윤흥신 장군상이 나온다.
버스로 가려면 YMCA역과 고관입구에서 하차하면 바로 갈 수 있다.
- 고관입구 정류소 / 103번 22번, 52번
- YMCA 정류소 / 101번, 134번, 167번, 168번, 17번, 26번, 27번
다대첨사 윤흥신 장군상 주변 풍경
주변은 작은 공원으로 만들어져 있다. 소나무와 철쭉등 다양한 식물이 식재되어 잇고, 산책할 수 있도록 도보와 쉼터도 조성되어 있다.
고관 마을로 입구
고관(古館) 마을은 조선시대 있었던 수정동의 두모포 왜관이 초량으로 이전하고 왜관이 있던 자리에 마음이 생기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구관이 고관으로 바뀌어 불리면서 고관마을이 되었다.
아직도 고관이란 이름을 가진 가계들이 상당히 많다.
YMCA버스 정류소
이곳은 부산의 중심 도로라 할 수 있는 '중앙대로'가 있는 곳이다. 부산진역과 초량 사이에 있는 정류소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