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현동 안동네 벽화마을
문현동 안동네 벽화마을로 불렸던 이곳은 오래전부터 '돌산마을'로 불렸다. 옛 주소는 부산광역시 남구 문현동 산 23-1번지이다. 부산진구에서 남구로 넘어가는 고개 정상에 자리하고 있다. 황령산의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하여 '황령마을'로도 불렸다. 2022년 6월 현재 주민들이 모두 떠나고 재개발을 위하여 부지는 이전집들을 철거한 상태이다.
- 문현동 벽화 마을의 다른 이름들 : 돌산마을, 횡령(황령)마을, 해골마을
돌산마을은 이곳에 크고 작은 돌들이 지대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원래 이곳은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공동묘지로 사용되었다. 마을이 철거될 당시까지도 무덤들이 주택 사이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것도 있었다.
방문일 2010년 7월 7일
문현벽화 마을의 집들은 대부분 불법 건축물에 속하며 대지도 사유지와 정부소유의 땅이다. 마을은 1950년대 이후 한국전쟁으로 인해 피난민들이 부산으로 몰려오면서 이곳에도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문현동은 영도나 수정동처럼 상대적으로 피난민들이 많이 찾지 않았다. 아무래도 당시 문현동은 외지이기도 했거와 시내와도 거리가 먼 산 중턱에 자리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거기에 공동묘지 자리였으니 얼마나 더 했겠는가.
영도나 수정동, 초량의 산복도로 주변 마을들은 조금만 걸으면 당시 최대의 번화가였던 남포동과 부산역에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하지만 문현동의 벽화마을은 상당히 거리가 있었다. 그래서 철거될 당시까지도 수정동 등에 비하며 주택수가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한국전쟁 이후 몇 사람들이 공동묘지 틈 사이를 비집고 살게 되면서 마을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마을이 커지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이후라고 한다. 산업화가 이루어지면서 시골에서 올라온 가난한 사람들이 갈 곳이 없자 돌산마을에 불법 판잣집을 짓게 되면서 마을다운 모습을 갖추게 된다. 하지만 정부는 이들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공권력을 이용해 불법 건축물을 모두 부수었다. 하지만 갈 곳 없던 이들은 다시 쪼개진 판자와 가마니를 기워 움막을 만들어 살았다. 그냥 일하는 사람과 생존을 위해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과의 싸움에서 승리는 당연히 생존을 위해 이곳에 머물게 된 마을 사람들에게 돌아갔다.
돌산마을은 감천벽화마을이나 수정동 피난민 판잣집 등에 비하면 상당히 완만한 편이다. 거기에 양지 바른 곳에 앉아 있으니 그야말로 명당자리다. 부산의 판잣집 마을들의 상당수가 예전 공동묘지인 것을 감안해 보면 죽은 자들이 누운 곳은 산 사람들이 살기 좋은 곳이다. 다만 산 중턱에 있어 높은 뿐이다. 그것을 뺀다면 햇빛도 잘 들고, 물도 잘 빠지고, 공기도 좋다.
<기억을 품다 흔적을 더듬다, 부산의 마을>에서 박희진 교수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돌산마을도 부산개발을 위한 이주정책 마을에 포함이 되어 다른 지역으로 이주했지만 생계와 다른 이유로 다시 돌산마을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이곳에는 포플러 숲을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무성한 잎에 가려 무허가 주택을 지어도 잘 보이지 않아 더 많은 무허가 주택들이 이곳에 들어서게 된다.
1987년 태풍 셀마로 인해 무성하던 포풀러 나무들이 많이 넘어졌고, 나무들을 베어낸 자리에 공터가 생기면서 더 많은 무허가 주택들이 들어서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1987년과 1988년에는 자고 나면 집이 한 채씩 들어섰다는 이야기가 지금까지도 전해진다. [박희진, 부산의 마을, 241쪽]
대동상점이란 간판에 '돌산길 100'이 선명하게 적혀 있다. 이곳이 예전에 돌산마을로 불렸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다른 산동네나 피난민촌에 비해 돌산마을은 낭만적이다. 마당도 많고, 숲과 풍경이 있어 살기에 나쁘지 않다. 개인 집들을 찾아가면 마당이나 집 근처를 개간하여 텃밭을 만들어 살아고 있는 곳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도시에서 보기 힘든 삽이나 호미 등이 집집마다 있다.
죽은 자의 쉼터 옆에 질긴 목숨을 이어가야 했던 산자들의 쉼터가 자리하고 있다. 사실,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는 단지 벽화마을 때문이었다. 이곳이 옛적의 공동묘지라는 사실은 이글을 쓰기 위해 자료를 정리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다. 참 안타깝다. 미리 알고 갔다면 묘지에 좀 더 주의를 기울였을 터인데. 이젠 과거 속으로 사라지고 없다.
부산의 여러 산동네나 달동네를 다녔지만 돌산마을처럼 덜? 개발이 된 곳은 흔치 않다. 아무리 판자촌이라도 시간이 흐르면서 집도 개량을 하고, 길도 포장되어 깔끔하다. 수도나 도시가스가 대부분 들어가 사는데 불편함이 거의 없다. 다만 비좁고 차가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은 대부분 공통적이다. 하지만 돌산마을은 아직도 포장되지 않은 곳이 대부분이고, 집들도 80년대 이전에 지은 그대로인 곳이 많다.
돌산마을은 대부분의 국유지와 사유지였던 탓에 국가복지정책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한 곳이다. 전기와 수도까지도 연결되지 않아 아침마다 마을 우물에서 물을 길러오기를 수십 년 동안 계속해 왔다. 1990년대 지하수를 파서 탱크를 만들어 식수를 얻었고, 2001년에야 정식으로 상수도가 들어왔다고 하니 얼마나 이곳이 소외된 곳이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돌산마을은 육이오전쟁의 피난민들과도 상관은 있지만 마을의 대부분 주민들은 부산의 공언화와 근대화 속에서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이 모여사는 곳이었다. 곳곳에 무덤들이 있어서 해가 지면 밖에 나가기가 무서웠다. 전기까지 없어 깜깜했으니 그 무서움이 얼마나 더했을까?
돌산식당. 이 가게인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돌산마을의 '칠성식당'은 영화 <친구>의 촬영장소이기도 했다.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동네다. 사실은 이 사진을 찍고 몇 번을 더 가려고 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다시는 가지 못했고, 결국 이곳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작년(2022년)에 듣고 너무 아쉬웠다. 많은 사진은 올리고 싶지 않으나 혹여나 이곳에 살았던 분이 추억을 더듬을까 싶어 찍었던 대부분의 사진을 사이즈만 둘여 이곳에 올려놓는다.
♣ 더 많은 부산의 자연마을을 살펴보기 원하는 분은 아래의 링크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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