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일동, 좌천동 매축지마을
매축지 마을
매축지 마을은 부산광역시 좌천동과 범일동을 겸하여 있으며, 제5부두와 허치슨부두와 붙여 있는 마을이다. 매축된 땅에 자연스럽게 생겨난 마을이라 하여 '매축지 마을'이란 이름이 붙었다. 현재는 범일동의 상당 부분이 재개발되어 오션브릿지오피스텔이 들어와 있고, 2023년 6월 두산위브더제니스하버시티아파트가 입주 예정에 있다. 현재는 범일동의 일부 구역과 좌천동 제자로 교회 주변이 남아 있는 상태다.
부산진성공원과도 직선거리로 300m가 되지 않으면 부산도시철도 1호선 부산진역과도 도보로 1km가 되지 않는 거리에 있다. 하지만 철길 위의 육교를 건너야하고, 정서적으로 생활편위성에 단절되고 고립되어 있는 곳이라 현재까지도 그다지 개발이 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번에 두산 아파트가 들어서고 주변이 정비가 되고 생활 편위시설이 들어선다면 이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만들어질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또 하나의 흔적이 사라진다는 점은 몹시 아쉽다.
- 방문일 2010년 6월 16일 수요일 날씨 맑음
매축지 마을을 방문한 날은 벌써 23년이 지난 2010년 6월이다. 지금과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지만 그때의 느낌과는 상당히 다르다. 이후 주변으로 거쳐 지난 적은 있지만 마을 안으로 들어간 적은 없다. 빠른 시일 안에 다시 방문할 예정이다.
매축지 마을은 기존의 마을과는 약간 다른 역사를 갖고 있다. 부산에서 '매축'이란 단어는 당연하면서도 의도적인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자연스러운 이유는 부산 자체가 평지가 없어 매축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축이 의도적이고 강제성을 띤 이유는 매축의 이유와 목적, 과정들이 일제의 조선 침략을 위한 수단으로써 부산이 활용되었기 때문이다.
일제의 매축 역사는 1913년부터 1932년까지 이루어졌다. 보통 1-3기로 구분한다. 그렇다고 이 시대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시기가 중요한 것은 현재 부산항의 틀을 마려한 것이 이 시기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부산 매축지 대부분은 일제강점기에 이루어진 것들이 많다.
일제는 초량에 있던 부산역을 현재의 위치로 옮기면서 매축이 필요했고, 제대로된 항구를 만들기 위해 연락선으로 불려진 거대한 배가 접안할 수 있도록 부두를 만들어야 했다. 기차역을 통해 들어오는 수많은 물건들을 실어 나르기 위해 매축이 필요했던 것이다.
범일동과 좌천동 매축지마을은 1927-1932년 제2기 부산산진 매축 때 생긴 마을이라고 한다. 대동아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전쟁을 위한 수많은 물자들을 만들고 자국으로 소송해야 했다. 또한 전쟁을 위한 병참기지를 건설해야 한다. 이러한 목적의 일부가 된 곳이 매축지마을이다.
매축지마을은 대동아전쟁에 사용한 징용자들을 임시적으로 수용하기 위해 범일동 매축지에 임시막사를 건설하게 된다. 그들은 징용되어 일본의 광산이나 전쟁물자를 만드는 군수공장으로 데려갔다. 하지만 갑자기 패망하자 막사를 그대로 두고 모두 일본으로 돌아갔다.
일본에서 다시 조선으로 돌아온 사람이 초기에 이곳에 살기 시작했다. 매축지라고 하지만 당시는 그냥 늪지대였다. 물도 없고, 제대로 된 길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매축지 마을을 떠나지 않았다. 부둣가에 있어 부두 하역작업과 조선방직 공장이 근처였고, 신발공장도 가까웠기 때문이다. 먹고살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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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축지 마을에는 2무3다라는 말이 있다. 2무는 부엌과 화장실이 없고, 3다는 빈집, 공중화장실, 노인이 많기 때문이란다. 막사를 개조해 거처를 삼았기 때문에 화장실이 있을 리가 없다. 당시 화장실은 마당에 있었다. 마당 없는 임시막사 화장실이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공동화장실이다. 아직도 매축지마을에 가면 공동화장실이 존재한다.
매축지마을은 한국전쟁 이후 더욱 많은 사람들로 채워진다. 피난민들이 매축지 마을에 기거하기 시작하면서도 안그래도 좁았던 마을은 피난 온 사람들로 밀집구역이 되었다. 전쟁 이후에도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조선방직 등의 많은 공장들이 부산진역 주변에 있었다. 조선방직은 1917년 11월 10일 처음 설립되어 운영되다. 해방 후에는 부산양조 대표인 하원준이 초대 관리인으로 선임되면서 재가동된다. 1946년에는 2대 관리인 최사열이 조상방직에서 한일실업공사로 개명한다. 3대 관리인인 정명석이 다시 '조선방직공사'로 개칭한다. 이후 몇 번의 변화를 겪지만 결국 1969년 부산시가 막대한 부채를 해결하면서 조선방직을 해산시킨다. 매축지 마을에서 살면서 자성대 옆에 있던 조선방직에 일을 하러 갔던 것이다.
매축지마을은 문현동 벽화마을로 불린 '돌산마을' 만큼이나 개발이 되지 않고 방치된 곳이기도 하다. 매축지마을은 시내 안에 있었음에도 다양한 이유들로 아직까지도 70년대 이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을 정도록 변화가 더디다. 하지만 이제 이곳도 서서히 변화되고 있고, 조만간 마을 전체가 사라질 것이다.
다시 찾은 매축지 마을. 2024년 4월 16일 매축지 마을
이렇게 좋은 골목에도 화분에 고추를 심어 기르고 있다. 노하우가 좋은지 잘 자란다.
2층집이 있다는 것이 놀랍니다. 그런데 의외로 많다.
매축지마을의 공동화장실. 이곳은 좌천동 입구 쪽이다.
철길 육교를 가보려고 다시 나왔다. 두산위브범일유타운아파트 앞 길이다. 앞으로 보이는 저곳이 철길이 지나는 곳이다. 부산진역에서 걸어와도 육교를 건너면 쉽게 이곳에 올 수 있다.
육교에서 바라본 철길.
철길 육교에 올라 바라본 매축지. 뒤로 5부두, 자성대부두가 보인다.
다시 내려와 골목길을 조금 더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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