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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시 영도구 지명 유래

에움길 발행일 : 2023-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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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의 지명 유래

영도 행정 지명 유래

영도구의 행정상 붙여진 이름에 대한 전래를 소개하는 곳이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알아낸 다양한 정보를 취합하여 정리했다. 주 인용처는 영도구청 홈페이지 구연혁이다.

 

영도구

영도구의 영도는 절영도에서 왔다. 절영도는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말이 너무 빨라 그림자를 볼 수 없을 정도라 하여 끊을 절, 그림자 영을 붙여 절영이라 하였다. 이후 절은 사라지고 영도로만 불린다. 절영도의 기원은 영도가 말을 기르기에 적합하여 양도에 말을 방목하면서 목장원이 생겼고, 이후 말들의 고향과 같은 곳이 되었다. 현재의 동삼동은 지대가 완만하여 말을 기르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영도 전역에서 말을 키웠지만 말들이 주로 활동한 곳은 동삼동으로 상리와 하리였다.

 

대교동

대교동은 영도대교 주변이다. 영도대교가 놓이기 전에는 북빈정이라 불렸다. 현재 자갈치 주변을 남빈이라 불렀다. 북빈은 북쪽 바닷가 마을이란 뜻이다. 1931년 영도대교가 개통되면서 대교동이라 불리게 된다.

 

 

대평동

대평동의 원래 이름은 풍발포였다. 바람이 이는 것처럼 기운차게 일어난다는 뜻이다. 1931년 일제는 영도 서북쪽을 매립하여 갑정이라 부른다. 갑정은 산허리로 바다쪽으로 뽀쪽하게 내민 땅을 말한다. 아마도 매축 이전에 그런 형태를 지녔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곳을 헐어 앞 바다를 매립하게 된다. 매립할 때 거칠고 강한 바람이 일어나 풍발포를 대풍포로 바꾸어 부르게 된다. 해방 후인 1947년 파도와 바람이 잔잔해지길 바라는 뜻에서 바람 풍을 평평할 평으로 바꾸어 대평동이라 부르게 된다. 현재 이곳은 깡깡이 마을이 있는 곳으로 대평시장과 대평동 지명들이 남아 있다.

 

대평동 깡깡이 마을 풍경 2022년 4월 27일

 

남항동

남항동의 옛말은 석말로 돌의 끝이란 뜻이다. 정확하지는 않으나 그곳이 돌이 많아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정확한 유래는 알려져 있지 않다. 19세기에 영계로 계명되었다가 영도대표 개통되면서 그 지역을 매립하면서 석견정이라 부르게 된다. 해방 후 부산 남항을 끼고 있다하여 남항동이라 부른다.  현재 남항동은 대교동, 대평동가지 아우르지만 좁게는 대평동에서 남항대교가 시작되는 곳까지를 일컫는다.

 

영선동

영선도의 옛이름은 나릿가이다. 옛부산시청 자리였던 용미산 아래 영도를 들어가는 나룻배가 있었다. 나릿은 '나루'에서 비롯된 말이다. 절영도 첨사 임익준이 1885년 영도 동명을 새로 지으면서 동해에 전설상의 섬 이름인 영주의 이름을 따서 '영선'이라 부른다. 일제시대 어영정이라 부르다 해방 후 다시 영선동으로 바꾼다. 현재 영선동은 현재 남항대교와 부산항 대교가 이어지는 영도 고가도로 주변이다. 그곳에서 봉래산쪽으로는 신선동이라 부른다.

 

영선동 4가에 위치한 흰여울 문화마을 골목길

 

신선동

신선동에 하씨당이란 당집이 있었다고 한다. 하씨당은 현재 영도 초등학교 확장 시에 훼손되어 사라졌다. 하씨당은 아씨당에서 비롯되었고, 여신을 모시는 곳이었다고 한다. 영도는 할매 전설도 그렇고 여자가 드센 곳이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다에서 일을 했기에 남자들이 많이 죽는 바람에 여성들이 많아 그런 속설이 생기지 않았나 싶다.

 

봉래동

현재 봉래산으로 불리는 영도의 큰 산은 옛적엔 고갈산으로 불렸다. 절영도진 첨사 임익준이 한문으로 고쳐 적으면서 신선이 산다하여 봉래산으로 명했다. 일본인들은 고살산(姑竭山)을 먹이 마른산 이란 뜻으로 고갈산(沽渴山) 또는 마른 도마뱀이란 뜻의 고갈산(枯蝎山)이라 불렀다. 하지만 정식 이름은 부산항을 마주한다하여 항정이라 불렀다. 해방 후 다시 봉래동으로 칭했다.

 

청학동

청학동은 HJ조선소에서 6.25참전비가 있는 곳까로 상당히 넓게 자리하고 있다. 영도에서도 가장 가난한 동네로 알려져 있으나 옛적에는 영도의 뿌리가 되는 곳이기도 하다. 선사시대 조개무지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 공도책으로 인적이 끊어진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청학동 아래의 해안지역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들어가 살게 되면서 마을을 형성하게 된다. 현재 청학시장 아래 입구 주변이 바닷가였다.

 

조래기라는 이름도 얻게 되는데 조내기는 바닷가가 낮고 개펄이 많아 썰물 때 물이 군데군데 조락한 곳이 많아 붙여졌다고 한다. 조선통신사 조엄이 일본에서 고구마를 가져와 처음 재배하면서 조선에 고구마가 퍼지게 된다. 청학동에서 재배된 고구마를 조내기 고구마로 부른다. 임익준이 신선이 타나는 학의 형상이라 하여 청학동이라 부르게 된다.

 

동삼동

실질적으로 영도에서 가장 큰 마을이 동삼동이다. 동삼동은 상리 중리 하리 3개의 부락으로 형성되었다. 상리는 현재 도개공에서 고신대 아래 마을 주변이다. 중리는 현재 중리 해변 주변 마을이다. 하리는 태종대 입구 주변을 말한다. 아직도 영도 사람들은 상리를 현재 상리초등학교 주변으로 알고 있다. 산 중턱에 자리하여, 청학동에서 동삼으로 넘어가는 길목 언덕이다.

 

영도의 마을 이름

 

이곳의 내용은 영도문화원 "지리(지명)"에서 가져와 일부 수정 보완한 것이다. 위의 내용과 겹치는 부분이 있으나 그대로 두었다.

 

자갈만대이

 

옛날 영도 곳곳에는 지형적 특성상 자갈이 많았다. 자갈이 싸여 있는 무더기를 사람들은 ‘자갈만뎅이’ 또는 ‘자갈만대이’라 불렀다. 특히, 고유명사로 된 지명으로서의 ‘자갈 만대이’는 현 영선동, 남항동 일대의 바닷가와 대평동 옛 수산진흥원 자리를 가리킨다.


대풍포(待風捕)마을

 

영도다리 옆 보세창고 부근 일대 지역으로서, 이 곳은 지형이 천연적으로 만(灣)을 이루고 있어 어선 등이 풍랑을 피하기 위해 대피하는 포구(浦口)의 구실을 하였다. 이러한 연유(緣由)에서 대풍포(待風捕)라고 하는 지명이 유래하였다.


태풍개

 

옛날 바람을 피하던 갯가였다고 하는 데서 ‘태풍개’라고 하는 지명이 유래하였다. 또한 이 곳은 바람이 잔잔하게 잠들 때까지 피하여 기다리던 포구라는 뜻에서 ‘대풍포(待風捕)’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구 대평동(현 남항동)과 그 바닷가는 태풍개를 매운 곳이다.


순파제(順波提)

 

이 지역의 파도가 잔잔하여 순하다는 뜻에서 붙여진 지명이다. 이 곳은 물살이 세어 나무로 만든 배가 지나갈 때는 다리에 부딪혀 부서지는 경우가 있었다 한다. 영도다리 중구쪽 입구 자갈치 선박 정박지 부근이다.

 

등바위목

 

옛날 영도나룻배를 띄웠던 곳으로서, 이 곳은 영도다리가 생기기 전에는 부산 시내쪽 뭍과 영도 섬 사이를 잇는 유일한 교통편인 나룻배의 물목이었다. 옛 부산시 청사가 있던 용미산에서 영도 쪽 갯가를 바라볼 때 그 동쪽에 큰 바위가 있었는데, 그 바위 밑의 물목을 ‘동바위목’이라 일컬었다. 현 남항동 영도대교 아래쪽(영도쪽)을 이렇게 불렀다.


한지골→함지골

 

한자로는 ‘일지곡(一之谷)’으로 표기한다. 이 지명은 한자가 갖는 의미인 ‘큰 골짜기’라는 데서 유래하였다. ‘한지골’이라는 원 지명이 구전되면서 ‘함지골’로 바뀌었는데, 그 것은 높은 곳에서 볼 때 이 지대가 함몰되어 있다고 하는 데서 ‘함몰된 땅의 산골짜기’를 줄여서 이렇게 불렀다는 설도 있다. 약 40년전 건설교통부에서 조사할 때 이 곳 지명을 ‘함지골’로 정한 이래 그 이름이 공식 지명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영선동 뒷산 골짜기 주변 일대를 ‘함지골’이라 부른다.

 

성발축(城發築)마을


영선2동에 있던 마을로 이 곳에 성이나 성과 비슷한 물체가 있었거나, 성을 쌓는 일과 관련된 설화가 구전되어 오던 중 ‘성말축(城發築)’이라고 하는 마을 이름이 생긴 것으로 추리되기는 하지만 분명치 않다. 이 곳은 ‘성발차마을’, ‘성발추마을’, 또는 ‘성발치’라 불려지기고 한다. 현 영선2동이 이렇게 불렸다.

 

매강추

 

한진중공업이 들어서기 이전 봉래동과 청학동 사이는 얕은 여울바다였다. 매립되기전 이 곳 일대의 바다는 수심이 얕은데다 너비가 좁아 조류가 세차게 흘렀다 한다. 물살이 세차게 흐르는 여울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 곳의 지명이 ‘매강추’이다. 이 일대 바다에는 ‘매강추 어장’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이 어장에서는 고기가 많이 잡혔다 한다. 봉래동 한진중공업이 자리 잡은 지역 일대를 가리키는 지명이 ‘매강추’이다.

 

나릿가마을

 

봉래동 영도다리 동쪽에 있던 마을을 ‘나릿가마을’이라 불렀다. ‘나릿가’란 진변(津邊)이라는 뜻을 가진 나루, 도는 나루터의 가라고 하는 낱말의 사투리성 변형으로서 ‘나릿가마을’은 나루터 변두리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유래하였으며, 이 곳은 또한 ‘진변마을’이라고도 불렸다. 지명이 시사하듯 1934년 영도대교가 가설되기 이전 이 곳에는 1890년부터 영도 섬과 부산 내륙 중구 지역 양안(兩岸)을 연결하는 나룻배가 닿는 나루터가 있었는데, ‘나릿가마을’이란 이 곳이 바로 나루터가 있었던 지역이었다는 데서 유래하였다. 영도대교의 개통과 함께 나룻배의 정기운행이 멈추면서 이 지명도 점차 세인의 입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나릿가마을’은 현 영도다리 동쪽 봉래동 지역을 가리키는 지명이다.

 

고리장터

 

‘고리장터’란 지명은 영도에 있었던 국마장(國馬場)과 관련이 있는 지명이다. 멀리 신라시대 이래 조선조 말엽 무렵까지 우리 고장의 옛 호칭인 절영도 섬 태종대 기슭과 봉래산 기슭의 경사지 일대에는 말들을 방목하는 목장이 있었는데 3천 준마(駿馬)가 용동(聳動)하던 이 방목장에서는 ‘절영산명마(絶影山名馬)’로 알려진 명마가 산출이 되어 견훤이 태조 왕건에게 예물로 바친 일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런데 이 목장에는 관리권을 가진 조정에서 매년 한, 두 번씩 목자(牧者)가 와서 말들을 검사하여 쓸 만한 말에는 낙인을 찍었고, 낙인이 찍힌 말은 국가의 필요에 따라 징발 되었다고 한다. ‘고리장’이란 바로 말을 검사하는 곳에 붙여진 지명이다. 이 때 말들은 둘레에 둥글게 고리모양으로 말뚝이 쳐진 곳 안에 갇힌 채 검사를 받곤 했는데, 말이 검사를 받던 말뚝이 쳐진 고리 모양의 장소라고 하는 데서 ‘고리장터’란 말이 유래하였다 한다. 고리장터는 ‘환장터’라고도 하는데, 이는 아마도 말이 낙인찍힐 때 뜨거움에 못 이겨 환장하듯 몸부림친 곳이라는 데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신선동과 봉래동 경계(봉래동 로타리 부근)가 바로 ‘고리장터’ 자리이다.

석탄고(石炭庫)마을

 

‘석탄고(石炭庫)마을’이란 청학1동 봉학초등학교 뒤쪽에서 천리교남성교회 뒤쪽 산등성이에 이르는 지역 일대를 가리키는 옛 지명이다. 이 곳은 문자 그대로 석탄창고가 있었던 지대이다. 이 곳에 이러한 지명이 붙여진 것은 1876년 부산항이 개항된 이후의 일본과 우리나라와의 정치적 관계와 관련이 있다. 부산항이 개항됨에 따라 일본인들의 세력은 부산에까지 급속히 확장되었고, 1885년에는 일본인들이 이 지역 일대가 포함된 영도 땅 약 5천평을 조차(租借)하여 사용하면서 그들은 이 곳에 해군 전용의 연료보급용 저탄장(貯炭場)을 조성하였던 것이다. ‘석탄고 마을’이라고 하는 이 곳의 지명은 이러한 사실(史實)에 연유(緣由)한다.

 

광암(廣岩)마을

 

청학동 동쪽 바닷가에 있던 마을로서 부근에 어장이 발달하여 형성되었고, 주변에는 큰 바위가 있었다 한다. 이 바위를 ‘너섬바우’, ‘넘섬바우(바위)’라 불렀고, 부근에 있는 마을을 넓고 큰 바위 즉 광암(廣岩) 부근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사람들은 ‘광암마을’이라 불렀다 한다. ‘광암마을’은 현 청학2동 사무소 부근 일대에 있었던 마을이다.


넉삼바위

 

현 청학2동 버스종점 부근에 있었던 바위에 붙여진 이름이다. 바위의 면적이 쌀 넉섬을 쌓아올린 만큼 넓고 크다 해서 쌀가마 단위를 넣어 ‘넉섬바위’라 일컬었다 한다. ‘넘섬바우’ 또는 ‘넉섬바우’라고도 불렸던 이 바위에는 마을 부녀자들이 빨래를 널곤 했었다고 하는 설화도 전해진다.

일산봉(日傘奉)마을, 일산배기

 

‘일산봉’ 또는 ‘일산배기’는 현 청학2동 영도자동차학원이 있는 지역 일대에 붙여진 지명으로서, 이 곳은 지대가 높고 언덕이 많이 있었던 관계로 주변에서는 해뜨는 광경을 맨 먼저 볼 수 있었던 것으로 여겨져 ‘일산봉(日傘奉)’이란 지명이 붙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곳은 ‘일산배기’라고도 불리는데, ‘일산배기’는 여기 있었던 언덕들에 붙여진 ‘일산벽’이 세월이 흐면서 사투리의 영향으로 ‘일산백이’로, 그리고 후에 ‘일산배기’로 불려진 것으로 보인다.

조락(潮落)마을

 

청학동 바닷가에 있었던 멸치어장이 발달했던 곳으로서, 여기 바닷가에는 낮고 개펄이 많아 썰물 때는 물이 군데군데 고여 조락한 곳이 많았다. 해서 ‘조락(潮落)마을’이란 지명이 유래했다 한다. 이 곳은 썰물이 되면 조수가 내려 드러난다고 하여 조수가 내리는 곳, 즉 ‘조내기’라고도 불렸다 한다.

 

무라이골짜기

 

이 곳은 원래 폭포가 있었던 곳으로서, ‘물아래 골짜기’라 불리던 것이 오랜 구전의 과정에서 ‘물아이골짜기’ → ‘무라이골짜기’로 변하였다. 일명 ‘천하(天下)골’이라고도 한다. 현 광명고 옆을 흐르는 개천에서 청학2동 버스종점 부근까지에 해당된다.


조내기(조네기)

 

영도의 옛 지명을 풀이한 기록들을 검토해 보면, ‘조내기’와 ‘조락마을’은 이명동지(異名同地), 즉 이름을 달리 하면서 두 개의 동일 지역을 나타내는 지명으로, 그리고 이명이지(異名異地), 즉 이름을 서로 달리 하면서 동시에 서도 다른 두 개의 지역을 가리키는 지명으로도 사용된 듯 하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조내기’의 경우 옛날 청학동 전체를 일컫는 지명으로도, 또는 조락마을과 동일한 마을(청학동 앞 바다에 있었던)을 일컫는 특정지역의 지명으로도 사용되었던 것이로 보이고, 조락마을은 위의 특정 지역을 일컫는 지명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등며들섬, 갈매기섬

 

청학1동 앞 바다에 있는 섬으로서 현재는 ‘갈매기섬’이라 불리는데, 옛날에는 ‘등며들섬’이라 불렸다. 확실치는 않으나 전해져 오는 대로는, 사람의 얼굴 들이 매끄럽지 못하고 무언가 돋아날 때 ‘머들머들’하다는 말을 쓰는데, 잔잔한 바다 위에 솟아 있는 섬을 얼굴에 돋아난 무엇에 비유하며 ‘머들섬’이라 했고, 여기에 ‘좋은 것’의 의미로 ‘덕’이란 한자를 붙여 ‘덕머들섬’이 된 것이 구전되면서 ‘덩머들섬’ → ‘등머들섬’ → ‘들며들섬’ → ‘등며들섬’으로 변했다 한다.

 

복지계안

 

옛날에 복어, 특히 졸복이 많이 잡혔다 하여 붙여진 지명으로, 현 영도구청 아래 미원상가가 있는 곳

선덤, 선덤마을, 선암(仙岩)마을

 

동삼동 입구에 있던 마을로서 부근에 큰 바위가 있다 하여 ‘선암리’라 불렸다 한다. ‘덤’은 ‘바위’를 뜻하는 경상도사투리로서 ‘부피가 썩 큰 돌’을 의미한다 해서 ‘선덤’, ‘선덤마을’로, 그리고 이것을 한자로 ‘선암(仙岩)마을’이라 불렀다 한다. 현 영도구청에서 의지의 꽃길에 이르는 지대에 붙여진 지명이다.

 

바가지새미

 

동삼동 상리에 있는 우물(샘)로서 봉래산 남동산록(南東山麓)에서 스며져 나오는 지하수에 붙여진 이름이다. ‘바가지새미’는 물이 바가지로 퍼내는 샘이라는 뜻에서 ‘바가지샘’으로 불렸고, 이것이 변하여 ‘바가지새미’가 되었다.

세이기골

 

해양대학교로 들어가는 진입로 입구 쪽에 있는 갯가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곳은 옛날 대형 범선들이 정박하던 자리로서, 일제 때 군수물자를 싣고 온 배가 이 곳에서 짐들을 풀었던 것으로 알려져 온다. 보통 다른 지방에도 ‘세이기’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곶’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세이기자갈

 

‘세이기자갈’이란 동삼동 패총 유적 아래쪽으로서 어선들이 대던 곳이자 자갈밭이 있는 곳에 붙여진 지명이다. 현 동삼동 하리

 

탱자나무골

 

‘탱자나무골’이란 동삼동 상리마을에 있는 골짜기로서, 봉래산 남동쪽 기슭에서 발원하는 하천의 계곡이며, 이 곳에는 탱자나무가 많다 하여 이러한 지명이 붙여졌다.


진내(鎭內), 토성진(土城鎭)
조선조 말엽 1881년에 세워진 군사기지인 절영도진(絶影島鎭)이 있었던 곳이라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위치는 동삼동 중리 부산체육고등학교 자리로서 이 곳은 ‘진내(鎭內)’ 또는 ‘토성진(土城鎭)’이라고도 불렸다. ‘토성진’은 이 곳에 토성이 있다 해서 붙여졌다.



오른장

옛날 어선이 정박하여 승선했던 사람들이 뭍으로 올라갔던 곳이라 해서 ‘오른장’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현 태종대 등대 밑 유람선 선착장

 

곤포

태종대 경내에 있는 곤포의 집 일대로서, 옛날 이 곳에서는 영도 다른 어느 곳에서 보다도 곤포(昆布), 즉 다시마가 많이 자랐기 때문에 이 곳에 ‘곤포’라고 하는 지명이 붙여졌다고 한다.

 

감지(甘池), 감정(甘井)

 

감연(甘淵) 또는 감정(甘井)은 동삼동 하리 서남쪽에 있었던 습지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곳에는 물맛이 달고 시원한 못이 있어 국마장에 방목되었던 말들이 목이 마를 때 이 곳에 와서 갈증을 해소하곤 했다 한다. 이 곳은 감정(甘井)이라고도 불렸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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