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의 고갯길] 좌천동 성북고개
산이 부자라 부산이라는 우수갯소리가 있다. 부산은 그만큼 평지가 적다. 일제강점기 이후 남포동과 중구, 초량 등을 매축 사업을 통해 넓히기는 했지만 불어나는 6.25 전쟁과 산업화로 인해 불어나는 인구는 다시 수많은 사람들을 다시 산으로 올라가게 했다. 그래서 유난히 부산에는 '고갯길'이 많다. 아직 정리도 다 못했지만 일단 고갯길 목록은 정리해 두었다. 나중에 다시 더 추가해야 하지만 말이다.
- 방문일 2022년 7월 14일
성북고개가 목적은 아니었다. 부산진성을 탐방하고 좌천동 정공단 정도만 살펴보고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여행은 나를 전혀 뜻밖의 장소로 이동했다. 결국 나는 정공단을 거쳐 안용복기념부산포개항문화관과 자천시민아파트까지 올라와 버렸다. 바로 위에 증상왜성이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웹툰이바구길까지 가고 말았다. 이곳에 있는 시장은 성북시장이다. 20년 전쯤에 한 번 오고 그날이 두 번째 방문이었다. 내 기억에 엄청 붐볐던 곳이었는데 20년 만에 찾아가 사람의 거의 없다. 사람이 이렇게 줄다니? 정말 너무 놀랬다. 뭐 하여튼 오늘은 성북고개 이야기를 해야 하니.
성북고개는 수정동과 안창마을 입구 삼거리 중간에 있는 고갯길이다. 이바구길을 지나 성북고개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서서히 가라앉는 시간이 이었다. 아직 밤이 오진 않았지만 성급한 가로등과 간판을 이미 불을 밝힌 후였다. 대청동에서 이어지는 산복도로가 이어지는 좌천동 산복도로 안에 있다.
성북고개의 역사
초기에 이곳은 전쟁으로 인해 피난 사람들이 판잣집을 짓고 살았던 곳이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사람들은 그곳에 그냥 머물러 살았다. 먹고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없지만 부산진역과 범일동 주변에는 조선방직과 삼화고무(범천동), 국제고무(범일동), 동양고무(초량), 삼일고무(범일동) 공장들이 있었다. 대부분이 북에서 외지에서 온 피난민들이었다. 그들은 고무공장에 취직해 밥을 먹고 살아야 했다. 어쩔 수 없이 그곳을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살아가야 했다.
아침이면 수많은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집에서 나와 고무공장들로 일하러 나갔다. 그리고 해가 지면 다시 검은 파도를 일으키며 그 높은 성북고개로 숨이 차도록 올라왔다. 한 푼이라도 아껴야 했던 이들은 힘든 일과를 마쳤지만 대부분 버스를 타지 않았고 걸어서 올라왔다. 차가 한 대 밖에 없어서 타지도 못했다.
당시를 기억하는 분들은 성북시장에서 교통부 쪽을 내려다보면 검은 파도(머리)가 새까맣게 성북고개를 향해 올라왔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을 피해 성북고개까지 올라왔던 이들이 먹고살기 위해 다시 성북 고개로 올라오고 있는 것이다.
성북의 지명 유래
성북은 성의 북쪽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성은 어떤 성일까? 성은 부산진성(釜山鎭城)이다. 부산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자성대가 부산진성이다. 자는 아들자자를 사용한다. 어떻게 해서 자성대가 된 것일까? 여기에 일본의 교활한 의도가 숨겨져 있다. 일본은 현재의 동구도서관 서쪽에 증산왜성을 쌓는다. 자신들의 성을 모(어머니)이라 붙이고, 부산진성을 자(아들)이라 붙여 자성대가 부른 것이다. 그런데도 아직도 부산사람들은 부산진성을 일본의 아들인 자성대라 부르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모든 명칭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의도된 명칭은 빨리 수정해야 한다. 이것은 마치 구시청 자리를 용미산이라 부르는 것과 같다. [용미산에 대한 내용은 "용미산 작은 돌산에서 롯데백화점까지"를 참고 바람]
부산진성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수군이 왜적에 맞서 피 흘려 맞선 곳이다. 조선 수군들의 수많은 피가 흘려진 검붉은 성, 그곳이 바로 부산진성이다. 임진왜란 당시 숨진 이들을 기념하여 만든 것이 바로 좌천동의 성공단이다. 우리는 이것은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성북고개는 좌천동과 범일동 경계에 있다. 누군가는 범일동이라 말하고, 누군가는 좌천동에 있다고 말한다. 성북고개는 누구의 것이 아니라 모두의 것이다. 시대의 아픔을 딛고 용감하게 살아왔던 이들의 기억의 공간이자 흔적이다. 날이 저물어 간다. 나도 186번 버스를 타고 내려간다.
성북시장 버스 정류소 앞에 있는 희망떡집, 아픈 시절을 살았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성북인들에게 주는 희망이 아닐까 싶다. 이젠 시대가 변해 젊은 사람들은 넉넉해져서 평지로 내려갔고, 서울로 많이 올라갔다. 아직 남겨진 이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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