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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구 서동

에움길 발행일 : 2023-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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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구 서동은 부산광역시 금정구의 밥정동이다. 행정동으로는 서1동, 서2동, 서3동으로 구분되어 있다.

 

부산시내에서 외진 곳에 속하며, 한 때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곳 중의 하나였다. 현재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서1동과 2동의 경우 아직도 부산 시내에서 최고로 높은 인구밀도를 자랑한다. 서동이란 지명은 금사초등학교와 중학교 근방에 있었던 '섯곡'이란 자연 마을에서 기원했다. 섯곡 마을은 아래의 글에서 참조 바람.

 

 

서1동은 서동의 중심을 지나는 서동로를 중심으로 동쪽 방향은 서동 미로 시장이 있는 곳이다. 서2동은 서동로의 오른쪽에 자리하며 시실산 아래자락에 자리한 마을이다. 서3동은 서동미로 시장 동편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서1.2동에 비해 경사가 급하지 않고 골목이 넓은 편이다. 섯곡마을은 서3동에 위치했었다. 현재 서3동은 뉴타운으로 지정되어 있지만 언제 개발될지 아무도 모른다. 사실 개발은 쉽지 않아 보인다. 20년 뒤는 몰라도.

 

 

서동은 조선후기 동래군 동상면에 속했다. 일제강점기 시절인 1914년 동상면의 서동과 금천동을 합해 동래면 서동이 된다. 해방후인 1959년 현재의 서동, 금사동, 회동동을 병합하며 동상동으로 명명하다. 하지만 영도에 동삼동이 있어 서동 외의 사람들은 항상 동상동과 동삼동을 헷갈려했다. 심지어 부산역에서 택시를 타고 동상동을 가자고 했는데 금정구가 아닌 영도로 들어가 다시 돌아오는 해프닝도 적지 않게 일어났다고 한다. 심지어는 동래역 근처에서 택시를 탔는데 영도 동삼으로 알고 부산진역까지 갔다 돌아온 사람도 있었다. 그 택시값은 누가 물었는지??? 결국 수많은 민원과 자존심 때문에 동상동은 서동, 금사동, 회동동으로 다시 분리된다. 기존의 동래구에서 1988년 1월 1일 동래구에서 금정구가 새로 분구되면서 서동은 금정구로 변경된다.

 

서동은 지리적으로 보면 부산 동부에 속하지만 묘하게 소외된 곳으며 외진 곳이다. 서동 사는 사람들은 잘 느끼지 못하지만 서동을 벗어나면 곧바로 서동이 외지라는 것을 느낀다. 아마도 이러한 소외감은 서동이 어디론가 향할 때 지나치는 경유지일 뿐이지 서동 그 자체를 목적으로 향하지는 않기 때문일 것이다.

 

 

시실산 중턱에서 바라본 서동 전경.

시실산 중턱에서 바라본 서동 전경.

 

서동은 분지처럼 되어 있다. 동쪽으로는 수영강이 흐르고 금사공단이 있지만 크지 않다. 서쪽으로는 시실산과 윤산이 이어지는 언덕으로 부곡동과 정서적인 경계를 이룬다. 서남쪽으로는 시실산이 자리하고 이꼬, 외부와 어느 정도 연결된 곳은 남서쪽 방향에 자리한 명장동이다. 하지만 명장동 사람들은 굳이 서동으로 가지 않는다. 갈 이유가 없다. 지도상으로 잘 드러나지 않지만, 명장동과 서동 사이는 복천동과 옥봉산 사이의 작은 언덕이 자리한다. 결정적으로 부산광역시 상수도사업본부가 서동과 명장도 사이에 자리하고 있어 묘한 단절이 이루어진다.

 

명장동 사람들은 자신들이 서동이 속해있지 않은 것에 대해 묘한 자부심을 느낀다. 아무래도 서동에 대한 이러한 복잡한 심정은 서동이 피난민들과 신평과 영도 등에서 들어온 이주민들 때문으로 보인다. 1968년 영주동과 충무동 사람들이 대거 서동으로 이주해 오면서 서3동(당시는 동상동)을 중심으로 자리를 잡게 되면서 서동은 기하급수적으로 인구가 늘게 된다. 

 

시실산 중턱에서 바라본 서동 전경.
시실산 중턱에서 바라본 서동 전경.

 

서동에 인구가 일어났던 시기는 사라호 태풍이 해변가를 덮치면서 수많은 판잣집들이 물에 휩쓸려 가거나 무너졌기 때문이다. 영주동에서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주해 왔다. 영주동 부산터널 위에 수많은 판잣집들이 있었다. 이곳에 비가 내리면서 수많은 집들이 쓸려 가듯 무너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직접적인 이주 계기는 아니었다.

 

한국전쟁으로 초량과 영주동 등은 수많은 판잣집들이 들어서면서 발 디딜틈이 없었다. 부산시는 영주동의 많은 판잣집을 철거하고 아파트를 세울 계획을 하고 그곳의 불량 주택들을 철거하고 서동으로 이주시킨 것이다. 이마도 영주동에서 왔던 사람들은 지금의 "영주아파트"에 있었던 사람들로 보인다.

 

북항과 부산항대교, 신선대 부두, 동구와 중구 그리고 영도 일대까지 내려다보 이는 부산광역시 중구 영주동 73-1 일원과 산1-200에는 부산 최초의 시영 및 시민아파트인 영주아파트가 있다. 부산은 일제 강점기 이후 항만도시로 변화되 면서 자연스럽게 몰려온 항만 노동자와 철도 노동자, 해방 후 귀환 동포, 그리고 6·25 전쟁의 피난민들로 인한 갑작스러운 도시 변화로 이에 따른 주거지 형성이 문제화되었다. 산지가 많고 평지가 적은 해안 도시의 특성상 도심과 주변 고지대는 과밀화되고 결국 이들은 움막이나 판잣집을 지어 산 중턱에 무허가로 무분별하게 정착하면서 많은 산동네가 형성되었다. 그 당시 산동네의 모습은 도시의 미관을 훼손할 뿐만 아니라 많은 도시 문제를 일으켰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55년 이후 강제 철거와 이주 정책을 시행하였고, 1967년 부산시 고지대 개발 5개년 계획에 의거 국공유지에 난립한 무허가 판자촌 정비사업의 하나로 영주동 에 있었던 무허가 주택 2,299동 전체를 철거하고 4,627세대 중 2,968세대는 다 른 지역으로 이주시켰으며 일부 888세대는 아파트를 지어 입주시켰다. [출처, 건축사 "사라지는 마을산복도로 위 아파트 부산 영주 시영 시민 아파트"]

 

시실산 중턱에서 바라본 서동 전경.
시실산 중턱에서 바라본 서동 전경.
시실산 중턱에서 바라본 서동 전경.
시실산 중턱에서 바라본 서동 전경.

 

서3동에서 바라보면 저 멀리 왼쪽으로 보이는 곳이 서2동이다. 산중턱에 있는 아파트는 동남타워이다.

 

서3동에서 높은 건물에서 바라본 서동 전경

 

2008년 강산병원에서 바라본 서3동 전경. 산 중턱에 길다란 건물은 금사초등학교다.  바로 앞에 서동의 기원이 되는 섯곡 마을이 자리했던 한성기린아파트가 보인다.

 

2008년 3월 서3동 모습.

 

서동 부산은행 앞에서 바라본 서동 삼거리. 여기서 잘 보이지 않지만 뒷쪽으로 서2동 시실산 아래의 주택가가 보인다.

 

2022년 4월 서동
서동시장 입구 새마을금고 앞 도로 2009년 6월

 

서동에서 가장 번화가는 서동시장 입구와 그 주변이다.사실 예전에는 어디라도 다 붐볐다. 그 중에서 서동시장 입구 주변은 사람들이 밀려 다녔다. 현재는 길도 많이 넓혀졌지만 당시는 왕복 2차선 도로 뿐이었다. 지금도 2차선이다. 하지만 당시와 지금은 인구밀도 차이가 5배 정도 차이가 난다. 지금은 한산하다못해 쓸쓸해 보인다.

 

서동삼거리에서 바라본 부곡동 넘어가는 도로
서동삼거리에서 바라본 서동로 2009년 6월

 

2008년 2월 서동 삼한 아파트
2008년 2월 서동 삼한 아파트

 

2008년 6월 9일 서3동

 

2008년 6월 19일 서동 미로 시장 주변 골목

 

2008년 6월 19일 서부로, 동성교회 앞 마을버스 정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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